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심적 병역거부/역사 (문단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평화주의를 자처하던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이 전쟁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노동계급의 이득이 아닌, 제국의 지배자들과 자본가들의 이득을 위한 전쟁임을 간파하여 반전운동과 그의 연장선상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나키스트, 반전운동가들이 합류했다. 그 중에는 수학자,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하다가 영국 국토 방위령(Defence of the Realm Act)에 의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원래 100파운드의 벌금형이 전부였으나, 버트런드 러셀은 저항의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벌금을 내지 않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1916년 영국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민간적 성향의 대체복무 또는 비전투병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병역법을 개정하였다. 다만 그 이전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가석방 없는 3년형'''을 살아야 했고 소급적용 따윈 없었다. 이 때문에 저널리스트 톰 스티븐슨 같이 1916년에 수감돼서 1919년 만기출소한 경우도 존재. 이 사람은 다니던 대학에서도 쫓겨나 고졸로 평생 살아야 했다... 다행히 사망 직전에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은 [[치머만 전보]]사건을 계기로 1917년 4월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럼에도 군에 자원입대한 청년들의 숫자는 6주간 7만 3천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쟁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100만명의 병사가 필요했다. 필요한 병력을 얻기 위해 미국 의회는 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통과시켰다. 또한 방첩법(Espionage Act)도 통과시켜,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인을 최대 20년간 투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급격하게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워블리(Wobblie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과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가 이끄는 미국 사회당(Socialist Party of America)은 제1차세계대전은 자본가들을 위한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의회가 선전포고를 하자 사회당은 이 선전포고를 “미국 국민에 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이들은 반전 집회, 징병 거부, 선전 활동, 파업 등을 통해 전쟁 반대 활동을 했고 대부분이 방첩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18년에 11,500여명이 정부나 전쟁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그 중 다수가 워블리와 사회당원이었다. 1917년 8월에는 [[필라델피아]]의 사회당원 찰스 셴크(Charles Schenck)가 징병법이 헌법에 위배되며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인류를 상대로 저지르는 잔인무도한 행위”이므로 청년들이 징병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단 15,000장을 뿌렸다. 대법원은 셴크에게 6개월 형을 선고했는데, 이는 방첩법 위반 사건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량 선고였다. 작가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이 편집자였던 사회주의계 잡지 『대중(The Masses)』은 징병에 반대하는 논평을 게재했다가 법정 공방 후 폐간되었다. [[오클라호마]]에서 가난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노동계급연맹(Working Class Union)’에서도 워블리들과 사회당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입대 저지를 위해 철도와 전신선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전국의 징병 거부자들을 위한 워싱턴 행진도 계획했다. 계획들이 실행도 되기 전에 회원들은 체포되었고 450명이 기소되었다. 지도자들에게는 3~10년형이, 다른 사람들에겐 60일~2년형이 선고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1921년 네덜란드 빌토번(Bilthoven)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은 국제 전쟁 거부자 모임([[http://www.wri-irg.org/|War Resisters’ International]])을 창설한다. 이들은 2019년 현재에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은 서구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캐나다의 경우 [[러시아계 캐나다인]] 중에서 두호보르파라는 소수 종파가 1차대전 당시 병역거부를 한 바 있는데, 이들은 세속 교육 완전 거부[* 오늘날 이스라엘의 하레디와 마찬가지로 성경 외에는 기초적인 산수만 대충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교리까지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캐나다 사회 전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캐나다 정부에서는 재사회화를 명분으로 두호보르파 자녀들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시켰고, 이후 두호보르파는 계속 교세를 잃어 오늘날에는 사멸 위기에 봉착한 상태이다.([[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54117|출처]]) 미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병역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한 재침례파들은 미국에서도 병역을 거부하였고, 경제적 빈곤 때문에 대체복무 비용을 내지 못해 수감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상무적인 개척 정신이 남아있던 미국 사회에서 이들의 병역 거부는 사회적 차별로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의 건국 이념 중 하나가 [[종교의 자유]]였고, 이 때문에 미국 내 진보 지식인 상당수는 종교적 병역 거부자들을 국가에 배신당한(미국의 건국 이념과 모순되는 처벌을 받는) 순진한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이미지가 바닥인 것과는 그 배경 및 상황이 대조적인 경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